밤에도 그것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대지를 담은 궤: vision> 182×228cm_캔버스에 아크릴_2022

어둠 안에서 열리는 눈

홍예지 미술비평가, 독립 큐레이터

산등성이를 타고 밤이 깔린다. 수백 번의 붓질이 지나간다. 마른 짐승의 등골처럼 움푹 패인 곳이 있는가 하면, 우둘투둘하게 솟아난 곳도 있다. 튀어나온 자리마다 희미한 은빛이 감돈다. 저만치 위로 폭포 소리가 들린다. 솨아아- 떨어지는 물줄기는 빛줄기가 되어 어둠의 베일을 들춘다. 수심(水深)은 마음의 깊이와 같고, 수천 개의 물방울이 측정할 길 없는 심연으로 스며든다.

김현호의 산수(山水)는 견고한 표면 너머로 “심리적인 배면(背面)”[1] 을 간직하고 있다. 겹겹이 도포한 카본 블랙 층 아래에는 오직 흑과 백으로 구성된 자연이 존재한다. 눈을 현혹하는 색들을 미련없이 걷어 내면서 맞아들인 세계다. 비움으로써 고요해진 화면은 화려함 대신 깊이를 얻었다. 그 깊이, 미세한 명암의 차이에 따라 무수한 사이-공간이 열린다. 관객은 저마다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걸어 들어간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 사원(寺院)에 불이 들어온다.

이 명상적인 그림들은 낯선 세계를 열어 보이면서 동시에 거두어 들인다. 언뜻 나타난 세계는 백일하에 드러난 자연이 아니다. 숨 멎는 암흑 속에서 은밀히 빛나는 자연이다. H. 롬바흐의 말마따나, 빛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은 낮의 빛보다 아침의 빛을, 아침의 빛보다 밤의 빛을 높이 평가한다. “밤이 낮보다 더 근원적이지 않은가? 빛이 빛일 수 있기 위해서는 결국 보다 광대한 어둠으로부터 빛나 오르는 것이어야만 하지 않는가? (…) 존재는 모든 것에 선행하는 무에 대항하면서 자신을 두드러지게 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2)  김현호의 화폭에서 산과 폭포는 어둠으로부터 “융기”한다. 이는 곧 “부활”이며,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것, 타자인 것, 사라지는 도중에 있는 것이 몸 자체 안에서, 몸으로서 돌출하는 것이다.” 3)

그림 속 자연은 접촉을 유도하면서 밀어낸다. “나를 만지지 마라.” 헤르메스적 시인의 눈을 가진 관객은 “이해(verstehen)”하지 않는다. “그는 본다.”4)  이 무지막지한 어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미지(未知)의 영역을 그저 받아들인다. 이 역설은 타자와 나, 자연과 인간 사이에 신성한 거리를 설정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어떤 물러남, 거리, 변별 그리고 ‘측정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나타난다.5)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다는 것, 밤이 오지 않을 수 없다는 것, 빛보다 어둠이 근원적이라는 것. 이 자명한 사실을 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서구의 몇몇 사상가들이 주장했던 것과 달리, 자연의 존재 여부는 나의 인식에 달려 있지 않다. 자연은 온전히 거기에 실재한다. 내가 바라보거나 말거나, ‘언제나 그곳에 있다.’ 자연의 절대적인 출현 앞에서 우리는 말문이 막힌다. 이해를 넘어서는 지점을 목도한다. 그럼에도 두렵지 않다. 우리의 몸을 천천히 감싸는 어둠에서 빛다운 빛과 조우할 수 있기에. 그렇다면 더 이상 “어둠 속에서 보는 게 문제가 아니다. 더 나아가 어둠에도 불구하고 보는 게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둠 안에서 눈을 여는 것이다.”6) 

[1] 르네 위그, 『보이는 것과의 대화』, 곽광수 옮김, 열화당, 2017, p.117.

[2] H. 롬바흐, 『아폴론적 세계와 헤르메스적 세계』, 전동진 옮김, 서광사, 2001, pp.38-39.

[3] 장-뤽 낭시, 『나를 만지지 마라』, 이만형∙정과리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5, p.33.

[4] H. 롬바흐, op. cit., p.35.

[5] 장-뤽 낭시, op. cit., p.29.

[6] ibid., p.76.

“이 전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2년도 청년예술가생애첫지원 사업을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