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에도, 그림에도, 많은 시간이 흐른다.」

콘노 유키
미술비평가

많은 시간이 돌에 흐른다. 강가에 굴러다니는 돌을 보고 우리는 그 돌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상상해 보기도 한다. 모양새를 보거나 성분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돌이 간직하는 시간의 흐름을 알아보기도 한다. 날씨나 지각 변동과 같은 자연 현상을 기록하는 한편, 돌은 인간의 시간을 기록하기도 한다. 고인돌은 자연물인 돌을 인간이 세우고 모신 것이다. 커다란 돌이 어떻게 운반되고, 당시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다. 꾸밈없는 생김새만 보고 자연과 일체가 된, 존재감이 덜한 존재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크고 움직이지 않은 모습은 인간에 없는 견고한 성질을 가진다. 미르체아 엘리아데가 말하듯이 인간이 만지거나 잡아보기도 전에 돌은 그들을 친다=그들에게 타격을 준다[1]. 그 타격을 받았기에, 이 돌을 가지고 와서 모신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보러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것은 알 수 없는 힘을 가진 덩어리이며, 그 알 수 없음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힘인 동시에 자신이 받아들이고 내가 가질 수 있는 힘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고인돌은 자연물의 형태를 가지면서 인간의 시간을 기록한다고 할 수 있다.

김현호 또한 타격을 돌에게서 받고 그림으로 옮겨 그렸을 것이다. 이번에 예술공간 의식주에서 열린 개인전 《스스로 말하는 돌 (혹은 그림)》에서 작가의 관심사는 고인돌을 그린 모습에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다. 작가는 현장 답사를 떠나 고인돌을 실제로 보고, 이번 전시에서 그 고인돌을 주로 회화 작업으로 그려 보여준다. 전시장에는 고인돌을 그린 회화, 고인돌의 표면을 확대해서 그린 회화, 고인돌에 비친 그림자를 그린 회화, 고인돌을 그리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 고인돌의 표면을 따라 손으로 글자를 쓰듯 그린 것을 출력한 천 작업이 있다. 그런데 고인돌의 배경 정보가 잘 드러나지 않는 점에서 어떤 사람은 의아해할 것이다. 이 돌이 어디에 있고 어떤 역사를 거쳐 왔는지, 작품 캡션에도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런데 작가의 지향점,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술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의 지향점은 고인돌의 소재지를 표시하거나 성분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고인돌이 담긴 시간의 흐름을 작품으로 담아내는 데 있다. 여기서 화가 김현호가 돌을 이해하는 방식은 고인돌의 궤적을 따라 그리고 따라 그려 나가는 것이다. 한때 고대인이 돌을 발견하고, 그것을 옮겨 와서 모신 것처럼 작가는 <스스로 말하는 돌>(2023) 시리즈에 자신이 본 돌을 가져온다. 전국 각지를 다녀온 작가의 시선에 충격과 매혹을 동시에 가져다준 돌이 여기—전시장에, 회화 공간에 도착했다.

전체상이 들어간 <스스로 말하는 돌>이 있는가 하면, 전시장에 함께 걸린 <그때의 별>(2023) 시리즈는 고인돌의 표면을 일부 확대해서 그린 것이다. 이 세부 묘사는 인간의 시선을 지상과 땅의 두 방향으로 연결하는 이음매가 된다. 멀리서 봤을 때 밤하늘을 연상케 하는 표면은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질감이 눈에 잘 들어온다. 마치 입체적으로 그려진 능선과도 같이, 작품 표면은 지도 즉 우리가 사는 세계로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고인돌의 힘이 인간을 초월한 곳에 있다고 여겨진 것처럼, 김현호의 이 그림은 인간을 초월한 공간인 우주와 지상을 향한다. <그때의 별>이 보여주는 것은 고인돌의 세부에서 출발한, 지상에서 올려다본 우주의 모습과 하늘에서 내려다본 지상의 모습이다. 하늘과 땅은 김현호의 이 그림에서 작가가 그림으로 남긴,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림으로/에 담은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연결은 곧 우리 인간과 인간을 초월한 존재의 연결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작가의 작품에서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는 표현이 적합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려진 대상 자체에 감지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을 초월한 존재, 우리가 있는 곳과 우리가 없는 곳 사이에서 함께 전율을 만든다는 의미에서 이해해야 한다.

김현호의 그림은 지금 우리가 사는 지상을 그린 지도와 우리가 살지 않지만 영향을 받고 어떨 땐 우러러보는 하늘의 양쪽으로 확장함과 동시에 이어 준다. 이는 작가가 돌에게서 받은 충격을 그림으로 받아들이고 그 힘을 다시 발산하여 보여 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돌에게 감지한, 인간을 초월한 힘은 우주와 지상으로 우리를 이끈다. 말하자면, 인간의 시선을 끌었던 돌은 이들의 시선을 그들보다 광대한 영역으로 이끈다. 그것은—그림으로 담아낸 작가와 작품을 보는 사람이 그렇듯이—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돌에는 여전히 많은 시간이 흐른다. 돌에 새겨진 시간이란 실질적인 동시에 비유적인 표현이다. 고인돌은 옮겨진 전후의 시간뿐만 아니라 이에 영적인 힘을 본 인간의 시선까지 담는다. 말은 ‘고인’ 돌이라고는 하지만, 여기에는 돌과 사람의 시선에서 본 많은 시간이 흐르고 또 머문다. 이번 개인전에서 소개된 두 영상 작품 <수신>(2023)과 <들어간 별, 나온 별>(2023)은 작품의 제작 과정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평면 작업의 내막을 밝히는 것이 아니다. 고인돌의 소재지나 성분을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작가에게 중요한 점은 돌에 흐르고 머무는 시간을 따라가는 과정이다. 영상 작품에 강조되는 것처럼, 작가가 예술가로서 보여주는 태도는 지정학적이거나 과학 연구적인 접근이 아니라 선을 그리고 시간을 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간은 특정 시점(時點) 대신 많은 시간들이 이어지고 겹친 결과, 그림으로/에 나타난다.


[1] ミルチャ・エリアーデ, 久米博, 『エリアーデ著作集第二巻 豊饒と再生 宗教学概論2』, 株式会社せりか書房, 1974, p. 101

관련전시: 《스스로 말하는 돌 (혹은 그림)》 (2023)

작가노트: 밤에도 그것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회화 자체 대한 메타적 접근과 한국화 재료의 개념적 확장은 나에게 있어 끊임없는 아방가르드를 생산할 수 있는 근본적인 물음이자 작업의 원천이다.

작가노트 中

불이 다 꺼진 새벽 시간, 옥상에 올라 뒷산의 풍경을 바라보곤 한다. 어둠 속 어렴풋이 드러나는 산의 풍경을 지긋이 바라보면 숨어 있던 시각의 예민함이 살아나면서 낮에는 할 수 없는 방식의 교감이 시작된다. 그리고 나와 산 사이의 가시광선이 사라진 공간으로 무의식 속에 숨어 있던, 서술할 수 없는 무한한 서사가 생성된다.

2020년 사회적 격리로 인한 반작용으로 자연에 대한 향수를 느끼면서 이를 회화로 소환하기 시작했다. 한국화에서 그리는 유토피아는 대부분 자연을 담고 있다. 한국화 적 미감이 체화되어 있기에 이러한 상황에서 자연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흑백의 아크릴 물감에 헤비바디 미디움을 섞어 마티에르를 내어 그려진 대자연의 그림은 일종의 신체를 가지게 되고 현실의 오브젝트로 내 앞에 나타난다. 정지된 이미지가 담긴 이 평면의 물체 위에 묽은 카본블랙 물감을 도포한다. 어둠이 요철 사이사이에 흘러 들어가게 되면 그림은 다시금 시간이 흐르게 되고 나와 같은 위상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자연은 새로운 몸을 가진 접촉 가능태가 되어 내 앞에 ‘존재’하게 된다.

이것은 “그림 연구”의 2부로, 직접 대면하고 싶은 것을 그림으로 소환하여 그것과 함께한 시간을 기록하는 그림연구 1부 “소환프로젝트”의 연장이다. 그리고 이것은 먹, 배접, 공기 원근법, 물의 시간성 등 한국화의 개념을 확장, 변형한 새로운 소환술이다. 이를 통해 현 시점에서 생각하는 ‘그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나름의 답을 하고자 한다.

관련 전시 : 밤에도 그것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그림자와 나 – 회화의 소환술에 관하여

김현호 작가론

홍예지 미술비평가

사방팔방에 이미지가 널려 있다. 하나가 더해진 대도 새로울 것 없다. 이미지라는 것이 처음 생겨났을 때, 그 옛날의 인간이 품었을 마음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의 생각과 느낌은 무덤 속 먼지로 가라앉았고, 그가 이미지와 맺었을 관계는 빛이 바랬다. 이 모든 비밀을 감추고 있는 이야기, 즉 이미지의 기원에 관한 신화는 사금파리 조각처럼 흩어져 후대인들을 기다린다. 과연 우리는 태초의 순간에 공유되었던 감각을 되살려낼 수 있을까?

김현호의 “소환프로젝트”[1]를 보면서 이미지의 마술적 기능을 암시한 옛 글을 떠올린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 겸 학자인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는 《박물지(Historia Naturalis)》에서 한 신화를 언급하며, 회화와 조각의 기원을 동시에 발굴한다. 코린트에 살았던 시키온의 도공 부타데스(Butades of Sicyon)와 딸이 그 실마리를 쥐고 있다. 부타데스의 딸은 사랑에 빠져 있었는데, 어느 날 연인이 기약없이 떠나게 되었다. 헤어지기 전에, 부타데스의 딸은 애인의 얼굴에 불빛을 비추어 벽에 그림자를 만들고, 그 그림자의 윤곽을 따라 그림을 그렸다. 부타데스가 여기에 진흙을 발라서 부조(浮彫)를 만들고 도기와 함께 구웠다. 나중에 이 초상 조각은 님프들의 신전으로 옮겨졌다는 것이 신화의 줄거리다.[2]

플리니우스가 직접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림자의 짧은 역사』를 쓴 빅토르 I. 스토이치타는 이 신화에 함축된 의미를 가설적으로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이미지의 기원은 “애정 관계의 중단에서, 헤어짐에서, 대상의 떠남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재현”은 일종의 “대체물”이자 대상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보조물”로서, 부재하는 것을 현존하는 것으로 만든다. 이 경우 “실물에 대한 그림자의 유사성(similitudo)”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3] 앞서 소개한 신화에서 그림자와 그림자를 떠낸 이미지는 둘 다 애인을 닮아 있다. 애인이 떠나면서 그림자는 사라지지만, 벽에 그려진 윤곽선은 그를 불멸의 형상으로 만들며 순간을 영원으로 포착한다.[4] 이 지점에서 스토이치타는 그림자를 “수직으로” 투영해서 그리는 행위를 강조한다. 고대인의 정신 세계에서 “땅에 누운 그림자”는 죽음과 연관된다. 따라서 이미지를 창조하는 순간에 직립의 형상으로 사람을 옮기는 작업은, 그 사람이 (눕지 않고) 서 있기를, 영원히 살아 있기를 바라는 염원의 표현이다.[5] 부타데스의 딸이 그렸던 그림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뒷부분에 마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래 그림자는 사람을 겉모습으로 축소시킨 뒤 벽에 투영함으로써 이중으로 “비현실화(un-realization)”한다. 즉, 그림자는 유령처럼 몸의 “타자”가 된다. 부타데스는 이 “허깨비에 존재감을 부여”함으로써, 애초에 비현실화한 것을 다시 “현실화”한다.[6]

스토이치타는 이미지의 탄생에 함축된 부재/존재의 변증법이 미술사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그 테마는 그림자의 윤곽을 떠내는 선에서 출발하여 점차 색을 칠하거나 형태감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다양하게 변주되어 왔다.[7] 구체적인 표현 방식이 어떠하든, 어떤 재료를 선택하든, 대상의 이미지를 제작하고 그것과 관계 맺는 행위는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무엇보다 이미지는 그리움의 대상을 현실 세계로 불러옴으로써, 남겨진 이들에게 깊은 위안을 준다.

이러한 이미지의 기원을 참조하면, 김현호가 진행해온 소환프로젝트에 담긴 심층적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유학 시절,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었던 작가는 등신대로 제작한 자화상을 한국으로 보냈다. 이 그림은 작가 대신 결혼식에 참석하여 다른 하객들과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있거나 단체 사진을 찍었다. 친구는 이 순간을 기록한 사진을 보내왔고, 이것이 소환프로젝트의 시작이다. 그림 그리기를 통해 부재하는 대상에 현실의 몸을 부여할 수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후 김현호는 한 명씩 의뢰인을 받아 프로젝트를 확장했다. 참여자는 만나고 싶은 사람을 이야기하고, 작가는 사연에서 키워드를 추출하여 그 대상을 닮은 그림을 그렸다. 프레임 없는 캔버스에 그린 그림은 참여자와 상의하여 쿠션, 이불, 신발, 가방 등 껴안고 걸칠 수 있는 대상으로 변모했다. 참여자는 작품을 받는 대신, 소환된 존재와 함께 보낸 시간을 기록하여 사진이나 영상으로 보냈다. 이 기록물들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각각의 그림이 살아 있는 사람처럼 다른 이와 어울리는 장면이 펼쳐진다. <소환프로젝트: 서인주>(2016)에서는 온 식구가 밥상 앞에 둘러앉아 돌아가신 어머니를 앉힌 채 담소를 나눈다. 소환된 어머니를 마주하고 -이때 어머니는 눕혀져 있지 않고 세워져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속에 있던 기억이 술술 풀려나온다.

소환의 대상은 인물에 한정되지 않는다. 2020년에 시작한 “밤에도 그것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시리즈는 자연물을 지금, 여기로 호출한다. 이미지를 제작하는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맨 처음 밑그림 상태에서 자연은 죽은 듯이 잠들어 있다. 산맥의 힘줄은 생기 없이 늘어져 있고, 폭포의 물줄기는 멈춰 있다. 본래의 색이 소거된 채 선으로 나타난 자연은 한마디로 비현실화된 형태다. 김현호는 이 윤곽선을 따라 요철을 만든다. 흑백의 아크릴 물감에 헤비바디 미디움을 섞어 울퉁불퉁한 질감을 낸다. 어렴풋한 형태가 서서히 도드라지며 촉각성을 띤다. 이 위에 묽은 카본 블랙을 도포하면 요철 사이로 물감이 흘러내리면서 입체감이 되살아난다. 정지 상태의 자연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소생의 과정을 담은 영상을 보면, 작가의 신체와 화폭이 비슷한 스케일로 되어 있으며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자연은 이쪽 세계로 소환되며 실시간으로 현실화된다. 저 옛날, 벽면에 비친 그림자가 몸을 얻게 된 것처럼 말이다.

소환술이 작동하기 위한 전제는 대상과 나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거리다. 대상이 떠나면서 벌어진 틈, 대상의 부재다. 그러므로 소환하는 회화의 본질은 완성된 화면에 있는 게 아니라, 그 화면이 그려질 수밖에 없었던 동기, 즉 대상과 내가 맺었던 관계의 특별함에 있다. 비디오를 되감듯 그림이 그려진 과정을 되짚어보자. 붓을 든 최초의 순간으로 가보자. 그때 화가는 무엇을 놓쳤거나 이제 잃어버리려는 참이다. 대상을 이루는 감각의 데이터들이 빠른 속도로 흩어진다. 화가의 눈은 허공을 향해 바삐 움직이고, 손은 그보다 한발 늦게 자취를 따라간다. 대상에 붙어 있는 마음과 그렇지 못한 몸의 괴리가 갈수록 심해진다. 그만큼 그림자를 그려내는 몸짓이 절실하다.

김현호는 이러한 회화의 본질에 일찍부터 민감했던 것 같다. 그리는 행위 자체에 대한 반성적 인식이 초기작들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화를 전공한 작가는 어느 날 화판에 붙였던 초배지에서 기이한 느낌을 받는다. 완성된 그림을 떼어내고 나면 초배지에 붓자국들이 남는데, 이 윤곽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고 느낀 것이다. 작가는 바로 이 흔적에서 출발하여 애초에 포착하고자 했던 존재를 되살려내는 작업을 했다. 이 초배지 작업을 앞서 살펴본 그림자 개념으로 읽어보면 의미심장한 점이 눈에 띈다. 초배지에서 ‘떠나간 대상’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그것은 그리고자 했던 인물이며, 이차적으로는 그 인물을 떠낸 이미지(=그림자)다. 그렇다면 완성된 그림을 걷어낸 뒤 초배지에 남은 얼룩은 ‘그림자의 그림자’인 셈이다. 이 아래층위에 기록된 것은 다름아닌 재현의 진실, 화가가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근원적인 역설이다. 김현호는 이 문제를 오랫동안 붙들어 왔고, 현재의 그림연구는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심화된 여정이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작가가 만났을 수많은 그림자를 상상한다. 몸을 잃은 존재, 흔적과 실루엣으로만 남은 존재. 마음속에만 살아 있는 누군가. 불빛에 흔들리며 애수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을 그린 회화는 밋밋한 평면이 아니다. 그것은 되찾으려는 열망이 기어코 불러낸 몸이다. 이 몸은 그림자와 나 사이의 물리적 현실을 구부러뜨린다. 시공간의 한계에 도전하려는 듯이, 그렇게 출현한다. 부단히 옮기고 또 그리면서, 김현호가 불러낼 무수한 존재를 기다린다. 이 존재들이 도달할 곳은 당신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 잃어버린 가슴, 가없는 어둠의 한복판이다.


[1] “소환프로젝트”는 김현호가 “그림연구”라고 이름 붙인 매체 탐구 작업으로서,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2015~2017)는 참여자가 보고 싶어하는 대상을 그림으로 소환하여 2D, 3D 형태로 만들고, 그것과 함께한 시간을 사진, 영상으로 기록한 작업이다. 2부(2020~)는 코로나19로 외출이 어려워진 시기에 향수의 대상이 된 자연을 질감이 두드러진 회화로 소환한 작업이다. 작가에 따르면, 각각의 경우에서 그림은 단순히 정지된 평면이 아니라 입체성과 촉각성을 지닌 “현실의 오브젝트”로 간주된다.

[2] 빅토르 I. 스토이치타, 『그림자의 짧은 역사: 회화의 탄생에서 사진의 시대까지』, 이윤희 옮김, 현실문화연구, 2006, p.14.

[3] ibid., pp.18-19. 강조는 필자.

[4] ibid., pp.19-20.

[5] ibid., pp.20-21.

[6] ibid., p.22.

[7] ibid., p.7.